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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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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유
曺漢儒
조선의 유학자
임금 숙종·영조
이름
조한유
미보(美甫)
양진당(養眞堂)
신상정보
출생일 1696년
출생지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도옥리
사망일 1752년
본관 창녕(昌寧)

조한유(曺漢儒, 1696년 ~ 1752년)는 조선 숙종(肅宗)·영조(英祖) 시기의 유학자로 자가 미보(美甫), 호가 양진당(養眞堂)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무신(戊申:1728)의 난 때에 남다른 충절을 보여주었으며, 이 시기에 지은 「무신일기(戊申日記)」는 무신의 난에 대한 생생한 기록으로 사료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저서에 『양진당실기(養眞堂實記)』가 있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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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유(曺漢儒:1696~1752)는 조선 영조(英祖) 시기의 유학자이다.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조정생(曺挺生)의 현손(玄孫)으로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도옥리(陶沃里)에서 태어났다.

양진당재실
『양진당실기(養眞堂實記)』
『양진당실기국역본(養眞堂實記國譯本)』
『양진당후손추원록(養眞堂後孫追遠錄)』

그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데다 효성 또한 지극하여 당시 유림(儒林)들의 귀감이 되었다. 영조(英祖) 무신(戊申:1728)의 난 때에 가까운 친족인 조성좌(曺聖佐)가 난에 가담하여 회유와 협박을 일삼았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내 말[馬]을 벨지언정 어찌 네가 타도록 주겠는가?”라 하고는 곧바로 자신이 기르던 말의 다리를 칼로 베어 꿋꿋한 충절을 보여주었다.

그 일로 인하여 당시 순찰사(巡察使) 황선(黃璿)은 그를 극찬하여 “진흙 속의 옥(玉)이자 모래펄의 금(金)[泥中之玉 塗沙之金]”이라 하고, 어사(御史) 박문수(朴文秀)는 “온 산에 죽은 나무뿐인데 잎사귀 하나 푸른 것[萬山枯木一葉靑]”이라 하여 ‘이중금(泥中金)’, ‘일엽청(一葉靑)’이라는 별호(別號)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가 무신의 난을 당해 반란군(叛亂軍)으로부터 몸을 숨기느라 숱하게 죽을 고비를 겪는 가운데 작성한 「무신일기(戊申日記)」는 그 희귀성도 희귀성이지만, 사료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성주(星州)의 선비 여팔거(呂八擧)가 「의검가(義劒歌)」를 지어 그의 충절(忠節)을 기렸으며, 벽진(碧珍) 이주대(李柱大)가 그를 위하여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와 『합천읍지(陜川邑誌)』, 『교남지(嶠南誌)』 등에 그의 행적에 대한 사항이 비교적 소상하게 기술되어 있다.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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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당실기(養眞堂實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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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에 후손 조상권(曺相權)과 조상희(曺相熙)가 2권 1책으로 간행한 양진당 조한유의 유고집이다. 권상(卷上)에는 그가 지은 양진당팔경시(養眞堂八景詩)와 무신일기서(戊申日記序) 및 일기(日記)가 실려 있으며, 부록(附錄)으로 양진당기(養眞堂記)와 의검가(義劒歌), 만사(挽詞), 행장(行狀), 묘지명병서(墓誌銘幷序), 유사(遺事) 등이 실려 있다. 권하(卷下)에는 향장(鄕狀)과 도장(道狀), 수의장(繡衣狀) 및 척실(摭實)과 발문(跋文) 등이 실려 있다.[1]

『양진당실기국역본(養眞堂實記國譯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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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강성위(姜聲尉)가 완역한 『양진당실기(養眞堂實記)』를 후손 조기종(曺企鍾)이 2008년에 도서출판 한림원(대구)을 통하여 출판하였다.[2]

『양진당후손추원록(養眞堂後孫追遠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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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당실기(養眞堂實記)』의 핵심이 되는 「무신일기(戊申日記)」 전문을 수록하고 무신일기와 유관한 논문과 추모의 글 등을 수록하고 있다. 2025년에 조기종 주편, 강성위 주역으로 대보사(大譜社)를 통해 간행된 이 책은, 기본적으로 추원록의 성격을 띠면서도 조한유와 관련된 현전(現傳) 기록을 집대성한 자료집으로서도 손색이 없다.[3]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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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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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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